"비극의 시대, 문학은 고통받는 존재에 귀기울이는 일"

입력 2022-11-09 16:29   수정 2022-11-09 17:07


재난이 반복되고 억울한 죽음이 이어진다. 30년 넘게 시를 써온 나희덕(56) 시인조차 “폭력과 죽음이 넘쳐나는 현실 속에서, ‘문학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나’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문학을 읽고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9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진행된 '2022 제30회 대산문학상 수상작가 간담회'에서는 ‘재난을 마주한 한국 문학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이태원 사고로 인해 한 차례 연기된 간담회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대산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대산문학상은 총 상금이 2억원인 국내 최대 규모 종합문학상이다. 시·소설·평론·희곡·번역 총 5개 부문에 시상하는데, 평론과 희곡은 번갈아가며 격년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

올해 수상작은 시 부문 <가능주의자>(나희덕), 소설 부문 <작별하지 않는다>(한강), 평론 부문 <문학의 열린 길>(한기욱), 번역 부문(불어) (한국화·사미 랑제라에르)다. 심사 대상은 소설·시의 경우 지난해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약 1년간, 평론은 지난 2년간, 번역은 지난 4년간 단행본으로 출간된 모든 문학작품이다.


나 시인은 “<가능주의자>에 수록된 시들은 고스란히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쓰여졌다”며 “사회적 재난을 겪으며 기후위기, 사회적 불평등, 죽음에 주목하게 됐고,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곁을 지킨다는 마음, 그들의 존재에 귀를 기울인다는 마음으로 시를 썼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시의 역할은 모든 스러져가는 것들, 죽어가는 존재들, 세상에서 지워져가는 목소리를 시 안에서 살려내고, 다정하게 그 곁을 지키는 일”이라며 “그래서 문학에 있어서는 저항과 다정함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고 했다.


표제작인 시 ‘가능주의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나 시인은 “현실의 어두운 전망들 속에서도 희미한 빛을 찾아보고 싶단 바람을 시에 담았다”고 했다. 희망을 찾는 일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봤다. “섣부른 희망이나 꿈을 유포하는 게 문학의 역할은 아니죠. 어슐러 르 귄이 ‘빛은 어둠의 왼손’이라고 했듯이, 어둠을 물리치는 외부의 거대한 빛을 기다릴 게 아니라 어둠 자체에서 빛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소설 부문 수상작인 한강(52)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세계적 권위의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 데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역사적 비극을 망각하려는 시도와 맞섰다.


한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쓸 때, 이건 무고한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며 “결국은 우리가 연결돼있다는 믿음을 붙잡고 소설을 썼는데, 요즘 접하게 되는 아주 많은 죽음들 속에서 그런 생각을 이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태원 사고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작별하지 않는다> 이후 여러 이유로 일년 넘게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며 “이 상을 주신 것이 ‘이제 그만 쉬고 다시 글을 열심히 써보라’는 말씀 같아 다시 아침마다 책상으로 가는 일상을 회복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한기욱(65) 문학평론가의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은 심사위원들로부터 “우리 현실에 대한 예민한 인식과 문학적 성취 사이의 대화적 고민이 남다르다”는 평을 받았다.

한 평론가는 이날 ‘한국 문학의 생명력’을 강조했다. 그는 “독자 수 감소로 ‘한국 문학은 죽었다’는 자조마저 나오지만, 한국 문학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입장을 져버린 적이 없다”며 “서구권에 비해 한국 독자들은 시와 소설을 즐겨 읽고, 특히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독자들이 문학을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했다.


소설이나 시에 비해 평론이나 번역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게 현실이다. 반면 대산문학상은 번역·평론 부문에 시·소설과 동일한 상금을 수여한다. 한 평론가는 "시, 소설, 희곡은 창작의 영역으로 문학의 필수 부문이지만 번역과 평론도 없어서는 안 될 분야"라며 "대산문학상이 이를 알아봐 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를 불어로 옮긴 번역가이자 소설가 한국화(35)·사미 랑제라에르(37) 씨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고 있어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올해 대산문학상 시상식은 다음달 1일 오후 6시 30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시와 소설 부문 수상작은 내년 번역 지원 공모를 통해 주요 외국어로 번역, 해외에 소개될 예정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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